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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공지능 향상과 생상성 증가 그리고 줄어드는 일자리, 우리의 사라코너는 누구인가.

인공지능 향상과 생상성 증가 그리고 줄어드는 일자리, 우리의 사라코너는 누구인가.

 

 

(암스테르담, 인간이 필요 없는 자율주행 보트 기사를 보며...)

 

 

 <기사 원문, 이미지 출처 더기어 http://thegear.co.kr/12928 >

 

 

이 기사는 it보다 사회 정치면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고 그것이 역사의 흐름인 것은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의 역사를 관찰해보면 그 흐름을 억지로 막으려 하거나 역행하려 할수록 나라가 망하거나 경제가 피폐해지고 시대에 뒤떨어졌다.

 

얼마 전 알파고가 우리나라의 이세돌9단을 이김으로써 인공지능 시대의 변곡점을 찍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전조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창의성을 컴퓨터는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행동패턴 알고리즘을 접목시켜 집단지성을 흉내 냄으로써 창의성의 부재를 해결했다. 또 그것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해 생산성을 극대화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예를 들어 기업은 물류운송을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이 사고율을 대폭낮추고 수익을 보장하는 안정적인 운송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어론사에서는 이미 (주식 등 일부) 인공지능 기사작성을 도입한 곳도 있다. 지성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기자들도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고 있은 것이다.

 

오래전 터미네이터(1)가 탄생한 배경인 수공업에서 자동화공장의 전환기처럼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를 빼았긴 노동자 말살 시대가 한발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요약]

https://youtu.be/VmnaFJ2sz5o

 

 

생산성이 극대화 되었는데 왜 이처럼 비극적 체감이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국민 투표에서 부결되었다. 스위스는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에 앞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연구하고 있다. 아직 이른 시점에서의 부결은 곧 언젠가 도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위스에서 국민투표에 붙여졌다는 것 자체가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적절한 시점이 오면 스위스는 기본소득을 통해 극대화된 생산성을 국민이 고르게 나누어 갖는 시스템으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나? 아이러니 하게도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시급한 나라는 스위스가 아니라 우리나라다. 노동자의 고혈을 쥐어짜 얻은 생산성을 자본가가 독식해서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 심해져서 기본적 복지 확대 정책 정도론 어림도 없다. 일자리를 늘려야할 정부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도 않고 정부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인공지능시대가 다가올수록 정부차원의 대응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서울시에서 도입한 청년수당 정책은 겨우 짠 바다에 각설탕을 타는 정도의 미미한 정책인데도 박근혜 정부에서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것을 보면 기본소득은 먼 나라 이야기 처럼 들린다.

 

정부나 국가차원에서 이러한 고민이 없는 것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것을 내놓으라고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처한 철학의 부재다.

 

 

오늘날 터미네이터들이 노리는 사라코너는 누구인가?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사라코너가 낳을 미래는 어떤 미래여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한다.

 

 

(글 안경유희)

 

 

<이미지 출처 구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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